미야모토 무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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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야모토 무사시는 1584년경 출생하여 1645년에 사망한 일본의 검술가, 병법가, 예술가이다. 그의 본성은 후지와라 씨이며, 니텐, 니텐 도라쿠 등의 호를 사용했다. 그는 이도류 검술을 창시하고, 검술 외에도 서예와 수묵화에 능했으며, 저서로 《오륜서》를 남겼다. 무사시는 간류섬의 결투와 교토에서의 요시오카 가문과의 대결 등 수많은 결투를 치렀으며, 오사카 전투에 참전하기도 했다. 그의 생애는 소설, 영화, 만화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의 소재가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일본과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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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모토 무사시가 밀교의 오륜 사상을 바탕으로 자신의 유파인 니텐이치류의 검술과 전략, 철학을 담아 저술한 병법서인 오륜서는 땅, 물, 불, 바람, 공의 다섯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미야모토 무사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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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름
본관은 '''후지와라씨'''이며, 묘지(名字)는 '''미야모토'''(宮本) 또는 '''신멘'''(新免)이다. 아명은 '''벤스케'''이며, 통칭(백관명)은 '''무사시'''이다. 휘는 '''하루노부'''(玄信)이다. 호는 '''니텐''' 또는 '''니텐도라쿠'''이다. 저서 『오륜서』에서는 '''신멘 무사시노카미 후지와라노 하루노부'''라고 칭하고 있다.[7]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蔵)의 초기 생애는 자세한 내용이 확실하지 않다. 무사시 자신은 《오륜서》에서 하리마국(播磨国)에서 태어났다고만 언급했다.[4] 무사시의 초기 전기인 《니텐기》(二天記)는 무사시가 1584년에 태어났다고 주장하며, "반슈(播州)에서 덴쇼 12년(1584년), 원숭이띠 해에 태어났다."라고 기록하고 있다.[5] 역사학자 카미코 다다시(神子忠)는 무사시의 아버지 신멘 무니사이(新免無二斎)가 미마사카국(美作国) 요시노(吉野) 지구 미야모토(宮本) 마을에 살았으며, 무사시가 아마도 여기서 태어났을 것이라고 추정한다.[6]
구마모토시 유게의 묘비에는 "신멘 무사시 거사"라고 적혀 있으며, 양자 미야모토 이오리가 무사시 사후 9년째인 쇼오 3년(1654년)에 세운 "신멘 무사시 하루노부 니텐 거사비"(오구라 비문)에는 "하리마 아카마쓰 말류 신멘 무사시 하루노부 니텐 거사"라고 적혀 있다.
무사시 사후 71년째인 『혼쵸 무게이쇼덴』(1716년)에서 '''마사나'''(政名)라는 이름이 소개되었다. 이를 인용한 계보나 전기, 공양탑이 널리 소개되면서 휘를 "마사나"로 하는 무사시 관련 소설이나 개설서가 많지만, 니텐이치류 문하생이나 고쿠라 미야모토 가의 사료에는 이 "마사나"라는 이름이 사용되지 않았다. 반대로 역사적 신뢰성이 완전히 부정된 무사시 계보 등에서 적극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3. 출생
무사시는 《오륜서》에서 자신의 이름과 칭호를 '''신멘 무사시노카미 후지와라노 하루노부(新免武蔵守藤原玄信)'''라고 밝혔다.[7] 그의 아버지 신멘 무니사이는 뛰어난 무술가이자 검술과 주테(jitte)의 달인이었다.[6] 무니사이는 미마사카국 요시노 지구 타카야마성(高山城)의 영주인 신멘 이가노카미(新免伊賀守)의 가신이었던 히라타 쇼겐(平田将監)의 아들이었다.[8] 히라타는 신멘 영주로부터 신임을 받아 신멘이라는 성을 사용할 수 있었다. "무사시"는 "무사시노카미(武蔵守)"라는 궁정 칭호로, 무사시국의 명목상의 지사를 의미한다. "후지와라"는 무사시가 자신의 혈통이라고 주장한 씨족이다.[9]
무사시는 어렸을 때 아토피피부염(湿疹)을 앓아 외모에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10]
3. 1. 생년
미야모토 무사시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진 《오륜서》 첫머리의 "셈하건데 나이 육십"이라는 구절을 바탕으로 역산하면, 간에이(寛永) 20년(1643년)에 세는나이로 60세가 되므로 무사시의 출생 연도는 덴쇼(天正) 12년(1584년)이 된다.[30]
에도 시대 후기에 정리된 《고쿠라 미야모토 가 계도》(小倉宮本家系図) 및 《미야모토 씨 정통기》(宮本氏正統記)에는 덴쇼 10년(1582년)에 태어나 쇼호(正保) 2년(1645년)에 향년 64세로 사망하였다고 기재되어 있다.[30]
3. 2. 출생지
《오륜서》에 "태어난 구니(国)는 하리마(播磨)"(「生国播磨」)라고 기재되어 있으며, 무사시의 양자인 이오리가 건립한 고쿠라 비문이나 에도 시대 중기의 지리지인 《하리마카가미》(播磨鑑)나, 이오리 자신이 도마 신사(泊神社)에 봉납한 표찰인 《도마리진자무네후다》(泊神社棟札, 효고현 가코가와시 기무라木村 소재) 등의 기재에는 하리마 국 출생설(현재에는 효고현 다카사고시 요네다정)이 있다.[4] 에도 시대 후기의 지리지인 《도사쿠시》(東作誌)에는 미마사카 국(美作国, 오카야마현 동부) 미야모토 촌(宮本村)에서 태어났다는 기재에 의해 미마사카 출생설도 있다.[6] 이 설은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 등에서 채용되어 널리 알려졌다. 소설을 토대로 오카야마현 미마사카시 등에서는 미야모토 무사시 탄생지로써 관광지 개발을 하고 있다.
3. 3. 가계
미야모토 무사시의 본성(本姓)은 후지와라 씨(藤原氏)이며,[9] 묘지(名字)는 미야모토(宮本) 또는 신멘(新免)이다. 어렸을 때 이름은 헨스케였다.[4] 무사시는 통칭(백관명)이고, 휘(諱)는 하루노부(玄信)이다. 호는 니텐(二天) 또는 니텐 도라쿠(二天道楽)이다. 저서 《오륜서》에는 신멘 무사시노카미(新免武蔵守) ・ 후지와라노 하루노부(藤原玄信)라고 적혀 있다.[7]
일본 구마모토 시(熊本市) 유게(弓削)의 묘비에는 「신멘무사시거사(新免武蔵居士)」라고 쓰여 있으며, 무사시의 양자인 미야모토 이오리(宮本伊織)가 쇼오 3년(1654년)에 세운 「신멘 다케조 하루노부 니텐 거사비」(고쿠라 비문)에는 「반슈(播州) 아카마쓰(赤松)의 말류(末流)인 신멘 다케조 하루노부 니텐 거사(播州赤松末流新免武蔵玄信二天居士)」라고 기록되어 있다.
1716년에 간행된 《본조무예소전》(本朝武芸小伝)에서는 마사나(政名)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고, 이를 인용한 계도, 전기, 무사시 공양탑 등이 일본 내에 널리 소개되어 그의 휘를 「마사나」로 하는 소설이나 개설서가 많다. 그러나 니텐이치류 문하생이나 고쿠라 미야모토 가문의 사료에서는 「마사나」라는 이름은 쓰이지 않았다.
현재 아리마 나오스미(有馬直純)와 나가오카 사도노카미(長岡佐渡守)에게 보낸 서찰에는 〈미야모토 무사시 하루노부〉(宮本武蔵玄信)라고 적혀있고, 나가오카 사도노카미에게 보낸 서찰에는 니텐이라는 호도 함께 적혀있다.
아버지는 아카마쓰 씨(赤松氏)의 지류인 신멘 씨(新免氏)의 일족 신멘 무니(新免無二)라고 알려져 있지만, 다른 설도 있다.
《고쿠라 미야모토 계도》(小倉宮本系図)에는 무사시의 양자 이오리의 할아버지가 벳쇼 씨(別所氏)의 가신 다와라 이에사다(田原家貞)를 친아버지로 하고 무사시는 그의 차남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오리 자신이 쓴 《도마리 신사의 표찰》이나 《고쿠라 비문》에는 그러한 기재가 없다. 또한 무사시나 이오리에 관한 대부분의 기사를 싣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에도 중기의 히라노 요슈(平野庸脩)가 작성한 지지 《하리마카가미(播磨鑑)》에도 무사시가 다와라 집안 출신이라는 내용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에도 시대 후기에 정립된 《고쿠라 미야모토 가계도》에서 '신멘 무니노스케의 양자가 되었다'(為新免無二之助養子)라는 기술을 근거로 신멘 무니는 무사시의 양아버지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신멘 무니에 대해서는 동시대에 활약한 도리류(当理流)의 미야모토 무니노스케 후지하라 가즈마와 동일 인물이라는 견해도 있다. 무사시의 양자 이오리가 봉납한 도마리 신사의 표찰에는 '有作州之顕氏神免者天正之間無嗣而卒于筑前秋月城受遺承家曰武蔵掾玄信'라고 기술하고 있다.
무사시의 양자 이오리가 남긴 기록은 생전의 무사시를 알고 있는 사람에 의해 쓰여진 것이라 비판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원사료가 불명확하고, 이오리가 무사시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 문제시하는 견해도 있다.
4. 생애
미야모토 무사시는 1584년에 태어나 에도 시대 초기에 활동한 검객이자 병법가이다. 니텐이치류 검술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생애는 수많은 결투와 무용담으로 점철되어 있다.
『오륜서』에 따르면, 무사시는 13세에 신토류의 아리마 기헤이와의 첫 결투에서 승리하고, 16세에는 다지마국의 아키야마라는 무예가를 이기는 등, 29세까지 60여 회의 결투에서 모두 승리했다고 한다.
무사시의 주요 생애는 다음과 같다.
날짜 | 나이 | 주요 사건 |
---|---|---|
1596년 | 11–12세 | 효고현 히라후쿠에서 아리마 기헤이와 결투. |
1599년 | 14–15세 | 효고현 북부에서 다다시마 아키야마라는 인물과 결투. |
1600년 | 16세 |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아버지 신멘 무니가 구로다에 봉직했다는 기록[60]에 따라, 구로다 조스이를 따라 동군으로 참전했을 가능성이 높음. |
1604년 | 19–20세 | 교토에서 요시오카 일족과 세 번의 대결. |
1607년 | 22–23세 | 아버지 무니사이가 무사시에게 자신의 기술을 전수함. |
1612년 | 28세 | 시모노세키 연안 간류지마에서 사사키 고지로와 결투하여 승리. |
1614–1615년 | 30–31세 | 오사카 전투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군 소속으로 참전. |
1626년 | 41–42세 | 양아들 미야모토 미키노스케가 할복. |
1637–1638년 | 53–54세 | 시마바라의 난 진압에 참가. |
1641년 | 56–57세 | 『병법삼십오개조』를 저술. |
1643년 | 58–59세 | 레이간도로 이주하여 은둔 생활. |
1645년 | 61세 | 『오륜서』를 완성하고 폐암으로 추정되는 병으로 사망. |
21세 무렵에는 교토로 올라가 요시오카 일족과 여러 번 결투를 벌여 모두 승리했다는 기록이 『오륜서』에 남아있다. 이 결투는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를 비롯한 여러 문예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무사시의 결투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간류지마 결투로, 사사키 고지로와 후나시마에서 싸운 것이다.
오사카 전투에서는 미즈노 가쓰나리의 객장으로 도쿠가와 측에 참전하여 가쓰시게 휘하에서 활약했다. 이후 히메지 번 번주 혼다 다다토키와 교류하며 아카시의 도시 계획을 담당하고, 히메지·아카시 등의 성과 사찰 정원을 조성했다.
1626년, 이오리를 양자로 삼아 아카시 번 번주 오가사와라 다다자네에게 출사시켰다. 시마바라의 난에서는 고쿠라 번 번주가 된 오가사와라 다다자네를 따라 이오리도 출진했고, 무사시도 나카쓰 번 번주 오가사와라 나가쓰구의 후견인으로 출진하여 반란군의 투석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1640년, 구마모토 번 번주 호소카와 다다토시의 초청으로 구마모토로 가 가로 이상의 신분에게만 허용되는 매사냥이 허가되는 등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호소카와 다다토시 사후에도 2대 번주 호소카와 미쓰나오에게 빈객으로 대우받았다. 1643년부터 레이간도 동굴에서 『오륜서』 집필을 시작하여 1645년 사망 직전 제자 데라오 마고노스케에게 주었다.
무사시의 무예는 처음에는 엔메이류로 불렸으나, 『오륜서』에서는 니토이치류(二刀一流) 또는 니텐이치류(二天一流)라는 명칭이 사용되었고, 최종적으로는 니텐이치류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4. 1. 세키가하라 전투 참전 여부
미야모토 무사시의 세키가하라 전투 참전 여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기존 학설: 무사시가 아버지 신멘 무니와 함께 구로다 요시타카(구로다 조스이)를 따라 동군으로 참전하여 규슈에 있었을 것이라는 설이다. 이는 신멘 무니가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에 동군의 구로다 가문에 출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문서[60]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 구로다 가문의 가신 다치바나 미네히라가 집필한 《헤이호타이소부슈겐신코덴라이》에서는 무사시가 구로다 요시타카의 군에 속해 분고의 이시가키바루 전투에서 서군의 오토모 요시무네 군과 싸웠으며, 출진 전의 일화와 도미쿠 성 공방전에서의 분전을 기록하고 있다.
- 최근 연구: 무사시가 서군에 속해 참전했다는 기존의 통설과는 달리, 아버지 신멘 무니사이가 더 이상 우키타 가문을 섬기지 않았다는 역사적 기록과 전쟁 중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맹이었던 구로다 씨족(Kuroda clan)의 씨족 기록에 무니사이 신멘의 이름이 전쟁에 참전한 가신들 중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바탕으로 무사시와 그의 아버지가 실제로 동군 편에 섰다고 주장한다.[13][14]
- 무사시가 세키가하라 전투가 아닌 이시가키바루 전투에서 싸웠다는 견해[13]와 무니사이와 무사시가 자신들이 섬긴 구로다 씨족과 마찬가지로 전쟁 중 도쿠가와 측에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는 견해[13]가 있다.
- 또한, 무사시가 세키가하라 전투 주요 전투에서 싸우지 않았고, 대신 구로다 요시타카 휘하에서 이시다 미쓰나리의 서쪽 지방 충신들과 오이타현 이시가키바루 전투에서 싸웠다는 이론[17]도 제시되었다.
어느 쪽이든,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무사시는 16세였으며, 서군 소속으로 참전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아버지와 함께 동군에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전투에 참여했는지는 현재 불확실하다.
4. 2. 교토에서의 결투
미야모토 무사시는 21세에 교토로 올라가, '천하제일의 병법가'로 알려진 요시오카 일족과 결투를 벌였다고 《오륜서》에 기록되어 있다.[60] 이 결투는 소설과 영화 등 다양한 작품에서 다뤄져 널리 알려졌다.고쿠라 비문에 따르면, 무사시는 교토에서 요시오카 일족과 세 번의 결투를 했다.
상대 | 장소 | 결과 | 비고 |
---|---|---|---|
요시오카 세이주로 | 교토 밖 렌다이노 | 무사시의 승리 (목도 일격) | 세이주로는 목숨을 건졌으나 출가 |
요시오카 덴시치로 | 교토 밖 | 무사시의 승리 (덴시치로의 목도를 빼앗아 공격) | 덴시치로는 사망 |
요시오카 마타시치로 외 수백 명 | 교토 밖 이치죠지 | 무사시의 승리 | 요시오카 측은 무사시를 죽이려 했으나 실패, 요시오카 가문 멸망 |
그러나 고쿠라 비문의 내용은 다른 사료와 비교했을 때 사실과 다르거나 과장된 부분이 많다. 특히 세이주로와 덴시치로의 결투, 이치죠지에서의 대규모 전투는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 신멘 무니와 요시오카 가문의 대결을 아시카가 쇼군가와 연결시킨 것도 이야기의 극적 효과를 위한 창작으로 보인다.
1727년 다치바나 미네히라가 쓴 《병법대조무주현신공전래》에도 요시오카 가문과의 결투가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고쿠라 비문의 내용을 바탕으로 전승을 추가하여 내용을 발전시킨 것으로 보인다.
1755년 도요타 마사나가가 완성한 《무공전》에는 무사시의 제자들이 전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이치죠지 전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나오는데, 무사시가 제자들의 참전을 거부하고 혼자 싸웠으며, 기습 공격으로 마타시치로를 죽이고 요시오카 측을 물리쳤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기록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윤색되고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무사시와 요시오카 일족의 결투는 일본 역사에서 유명한 사건으로 남아 있다.
4. 3. 간류지마 결투
thumb(오른쪽)와 싸우는 미야모토 무사시]]게이초 연간, 부젠 고쿠라 번 영지(현재의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 간류지마에서 간류(사사키 고지로)라는 병법가와 결투를 벌였다는 '간류지마 결투'가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결투는 에도 시대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림극, 조루리, 우키요에, 소설, 영상 작품 등 다양한 대중문예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1611년, 세키가하라 전투 후 무사시는 규슈 묘신지에서 좌선을 배웠다. 무사시는 호소카와 다다오키라는 다이묘 영주의 관리인 나가오카 사도에게 소개되었다. 불분명한 상황에서 무사시는 사사키 고지로라는 검객과 결투를 벌이게 되었다. 무사시는 도전을 받아들였고, 1년 후인 1612년 4월 13일 간류지마에서 싸우기로 예정되었다.[20][19] 그 날이 되자 섬에는 결투를 구경하려는 관중들로 가득 찼다. 고지로는 긴 칼날의 ''노다치''로 싸우는 것으로 유명했다.[20][19]
무사시는 고의적으로 늦게 도착했다고 한다.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동안 그는 노를 ''보켄''(나무로 만든 연습용 검)으로 조각했다. 고지로는 기다리는 동안 참을성을 잃고 늦게 도착한 무사시를 조롱했지만, 무사시는 태연했다.[20][19] 결투는 무사시가 빠르고 치명적으로 고지로를 공격하여 머리를 향한 수직 베기로 그의 두개골을 부수면서 끝났다.[20]
4. 4. 오사카 전투 참전
오사카 전투(1614년~1615년)에서 미야모토 무사시는 미즈노 가쓰나리의 객장(客将)으로 도쿠가와 가문 측에 속해 참전했고, 가쓰나리의 아들 가쓰시게와 함께 활약했다는 것이 많은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60] 도요토미 가문 측에 속해 참전했다는 것이 통설로 여겨졌지만, 이는 근거없는 속설이다.1614년 오사카 전투 당시 무사시는 그의 친구인 미즈노 가쓰시게(가쓰나리)의 지휘 아래 도쿠가와군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무사시는 가쓰나리의 깃발을 들고 있었고,[21] 가쓰나리의 아들인 미즈노 가쓰토시의 호위도 맡았다고 한다.[22] 후대에 시마바라의 난 당시, 무사시가 도쿠가와 장군에게 오사카 전투에서 미즈노 가쓰나리의 지휘 아래 복무했으며 군사 시스템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23] 무사시의 양자인 미야모토 미키노스케도 이 전투에서 가쓰나리 휘하에서 복무했다.[24]
날짜 | 주요 사건 |
---|---|
1614년~1615년 |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군대에 합류하여 오사카 전투(겨울, 여름 전투)에 미즈노 가쓰시게의 지휘 아래(1614년 11월 8일 ~ 1615년 6월 15일) 오사카 성에서 싸웠다고 여겨지지만, 중요한 공헌은 기록되어 있지 않음. |
4. 5. 이후의 행적
《오륜서》에는 무사시가 13세에 아리마 기헤이와 결투하여 승리하고, 16세에 다지마 국의 아키야마라는 무예가와 결투해 승리하는 등, 29세가 될 때까지 60여 회의 승부를 벌였고 모두 자신이 이겼다고 기술하고 있다.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신멘 무니가 동군(東軍)의 구로다 가문에 출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구로다 가문의 문서[60]가 존재한다. 따라서 무사시는 아버지와 함께 구로다 죠스이를 따라 동군으로 참전해 규슈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헤이호타이소부슈겐신코덴라이》에서는 구로다 요시타카의 군에 속해 분고의 이시가키바루 전투에서 서군의 오토모 요시무네 군과 싸웠으며, 도미쿠 성 공방전에서의 분전을 적고 있다.
《오륜서》에는 "스물한 살이 되어 도쿄로 올라가, 천하의 무예가와 만나 수번의 승부에서 승리하지 않은 일이 없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천하의 무예가'란 요시오카 일족이라고 사료되고 있다. 이 결투는 문예작품 등에서 다양하게 각색되어 널리 알려졌다.
무사시가 치른 결투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은 '간류지마 결투'이다. 부젠 고쿠라 번 영지의 후나지마에서 간류라는 병법가와 싸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다양한 대중문예 작품의 제재가 되었다.
오사카 전투(1614년~1615년)에서 미야모토 무사시는 미즈노 가쓰나리의 객장(客将)으로 도쿠가와 가문 측에 속해 참진했고, 가쓰나리의 적자 가쓰시게와 함께 활약했다는 것이 많은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그 후, 히메지 번의 번주 혼다 다다토키와 친분을 가졌고 아카시 지역에서는 도시 계획을 했으며 히메지, 아카시 등의 성과 사원에 정원을 조성하였다. 《海上物語》에서는 이 시기 신도무소류의 무소 곤노스케와 아카시에서 시합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겐나 초엽, 미키노스케를 양자로 맞이하였고, 미키노스케를 히메지 성주 혼다 다다토키에게 출사시켰지만, 1626년 혼다 다다토키가 죽자 순사하였다. 이에 미야모토 가문은 미키노스케의 동생을 그의 후임으로 해 존속시켰지만, 같은 해에 이오리를 새로운 양자로 맞이하였고, 오가사와라 다다자네에게 출사시켰다. 이오리는 1631년 20세의 나이로 오가사와라 가문의 가로(家老)가 된다.
1638년에 일어난 시마바라의 난에서는 고쿠라 성주로 부임한 오가사와라 다다자네를 따라 이오리도 출진하였고, 무사시도 나카쓰성주 오가사와라 나가쓰구의 후견인으로 하여 출진하였다. 난이 진압된 후에 노베오카 성주인 아리마 나오즈미에게 보낸 무사시의 서찰에는 반란군의 투석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고 적고 있다. 또, 고쿠라에 머물러 있을 때 오가사와라 다다자네의 명령으로 다카다 요시쓰구와 시합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간에이 17년(1640년) 구마모토 성의 성주 호소카와 다다토시에게 손님으로 초대되어 구마모토로 가게 된다. 칠인부지(7人扶持) 18석에 구휼미 300석이 지급되었고, 구마모토 성 동부에 인접한 지바 성(千葉城)에 저택을 받았다. 가로(家老) 이상의 신분이 아니면 허가되지 않는 매사냥이 허용되는 등 파격적인 대우로 맞이하였다.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남겨진 아들 아시카가 도칸과 함께 야마가 온천에 초대되는 등 호소카와 다다토시에게 존중받았다. 다음 해 다다토시가 죽은 후에도 2대 번주 호소카와 미쓰나오에게도 이전과 같이 매년 300석의 구휼미가 지급되어 빈객으로서의 대우를 받았다. 이 무렵 제작된 그림과 공예품 등이 오늘날에 전해져 온 것들이다.
간에이 20년(1643년) 구마모토 시 근교의 긴푸 산(金峰山)에 있는 레이간도 동굴에서 《오륜서》의 집필을 시작하였다. 또, 죽기 며칠 전에는 〈자철서〉(自誓書)라고 불리는 독행도와 함께 《오륜서》를 제자 데라오 마고노조에게 주었다.
조오 2년(1645년) 5월 19일(양력 6월 13일) 지바 성(구마모토)의 저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2세였다.
미야모토 무사시의 무덤은 일본 구마모토 시 유게(弓削)에 있는 통칭 무사시즈카이다. 기타큐슈 시 다무케 산에 양자 미야모토 이오리가 세운 《신멘 다케조 하루노부 니텐 거사비》 통칭 고쿠라 비문이 있다.
무사시의 무예는 처음에는 엔메이류라고 불렸지만, 《오륜서》에서는 니토이치류(二刀一流), 또는 니텐이치류(二天一流) 두 가지 명칭이 사용되었고, 최종적으로는 후자인 니텐이치류로 정착되었다고 여겨진다. 후세에는 무사시류(武蔵流) 같은 이름도 사용된다.
무사시가 구마모토에 머무르던 시절 제자 데라오 마고노조, 모토메노스케 형제가 있었고, 히고 구마모토 번에서 니텐이치류 검술이 융성하였다. 또, 마고노조의 제자 가운데 한 명인 시바토 산자에몬은 후쿠오카 번의 구로다 가문에 니텐이치류를 전수하기도 하였다.
5. 결투 전설에 관한 설들
(사사키 코지로)